축복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이 본문은 우리가 일부러 찾아서 읽는 말씀은 아니지만 사실 어떤 성경 본문보다도 우리가 굉장히 익숙하게 느끼는 본문입니다
. 예배를 마실 때에 축도로 자주 쓰이는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이죠. 목사님들이 예배의 마지막 순간에 두 손을 들고 축복을 선언합니다
.이 축복의 선언을들을 때 성도님들은 한 주간 세상을 향해 나아갈 어 위로 힘과 위로를 받습니다
. 그래서 너무나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이 기도가 품고 있는 그 뒷 이야기를 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이 평온하게만 보이는이 문장이 사실은 한 사도의 찢겨진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과 같은 어 그런 고백임을 알고 계십니까? 자신을 배신하고 모욕했던 영적 자녀들을 향해서 어 깨어진 그 관계의 벼랑 끝에서 마지막 남은 그 사랑을 짜내어서 써내려간 어 피와 눈물의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이 문장입니다
. 오늘 우리가 마주할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은 단순한 의뢰적인 축복이 아니고 가장 깊은 상처와 고뇌 속에서 피어난 화해의 기도이고 치유의 선언입니다
. 그래서 오늘 설교의 목적은 바로이 축복의 기도가 탄생한 배경. 그러니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얽히고 설힌이 애증의 관계를 좀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를 이를 통해서 우리는이 말씀이 오래된 편지 속에 남아 있는 어떤 박제되어 있는 문장이 아니고 오늘까지도 오늘 우리의 공동체에도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우리 공동체에 깨어진 부분들,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는 살아 있는 축복의 처방전인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이 말씀 함께 같이 나누면서 함께 오늘이 배경부터 함께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 신약에 찾아보면 고린도전서와 고린도 후서가 있습니다
.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죠. 고린도전서는 영어로는 first스 코린티안스라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은 바울이 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두 번째 편지입니다
. 바울이 처음으로 쓴 편지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그래서 두 번째로 쓴 편지를 퍼스트 코린티엔스라고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이죠.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그 제자들과의 관계는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습니다
. 수년 동안 그가 고린도에서 곤혹을 치렀고 또 고린도 교회에서도 교회와도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 처음에 바울이 고린도에 혼자 왔고이 나중에 디모데와 신라가 합류합니다
. 바울은 천막 제조업자로 그 고린도에서 이제 일하면서 교회를 세워 갑니다
. 상당히 어렵고 민감한 시기였어요. 바울은 유대교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공격받고 박해 당했습니다
. 그래서 열심히 또 교회 창립을 도은 후에 바울은 수리아로 건너갑니다
. 고린도전서가 쓰여지기 전에 첫 번째 진짜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린도 전서에 있는 힌트들을 통해서 보면 아마도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성적 부도덕함과 그리고 또 부도덕한 사람들과 사귀는 문제에 대해서 경고할 목적으로 쓰여졌던 것 같습니다
.이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굉장히 성적 방종이 심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 고린도 사람처럼 군다
. 이런 말이 어떤 뜻이었냐? 아무하고 아무나와 자고 다닌다
. 이런 식으로 성적 방종에 대한 그런 그 관용구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좀 그 성적이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 그래서 이제 바울이 그거에 대해서 어 지적하고 그리고 또 그것에 대해서 경고할 목적으로 첫 번째 편지를 보냈었던 것이죠. 그런데 첫 번째 편지를 보낸 바울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가 않고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개바파, 심지어 그리스도파까지 서로 나뉘어서 막 논쟁이 난무했고 성적 부도닥에 대한 비난이 서로 오았습니다
. 게다가 이제 바울이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 약속했지만 오히려 이제 아시아 쪽으로 간 것에 대해서 그의 적대자들이 바울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대 이러면서 서로 입방화를 지었습니다
.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야라면서 어 그 이제 바울의 연약한 부분들에 대해서 막 공격했고 심지어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거뒀던 돈을 바울이 착했다
, 횡령했다
. 이런 비난까지도 있었습니다
. 바울이 이런 상황을 전에 듣고 에베소에서 편지를 이제 또 쓰고 디모데를 보내서 상황을 진정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 하지만 정황상 교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두 번째로 방문합니다
. 하지만이 방문은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가슴 아픈 방문이라고 합니다
.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불일치들을 좀 해소하고자 하였지만 바울마저도이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지를 못했습니다
. 이때 아픔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 고린도후서 2장 1절 말씀을 공동번역고 읽으면 이렇습니다
. 자신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 바울이 쓰기를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좀 살펴보면 바울이 제일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에요. 교회에서 크게 창피를 당하고 큰 근심을 안고선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래서 그렇게 가슴 아픈 방문을 마친 후에이어서 바울이 또다시 편지를 쓰는 거예요. 세 번째로 보내는 편지는 슬픔의 편지라고 하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로 굉장히 엄중합니다
. 고린도후서 2장 4절 말씀. 나는 몹이 괴로워하며 걱정하는 마음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썼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가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 또 7절 7장 8절 말씀을 보면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 그 편지가 잠시나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그 바울은 세 번째 편지를 쓰고 이게 너무 직설적이어서 내가이 편지를 보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 또 심사숙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편지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이 편지가 전해진 후에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교회 상황을 전해듣고는 전해 듣기를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회개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또 그 후에도 또 다시 반대파가 또 등장했고 바울은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까지 굉장히 매우 엄중한 내용의 편지를 씁니다
. 서 여러분 고린도 후서를 읽으면 그 앞에 부분과 나중에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까지의 내용을 읽어 보면 굉장히 어조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 그런 후에 바울이 이제 사도행전 20장 2절에 나오는 것처럼 마게도니아 지방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고린도 교회에도 방문하는데 참 다행히도 학자들은 이때 아마도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잘 영접하고 거기에서 이제 바울이 겨울을 나면서 로마서를 집필했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 바울과 고린도교회 이렇게 쉽지 않았죠. 고린도전서와 고린도 후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기록된 편지들입니다
. 고린도 교회는 이렇게 바울과 애증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사람이고 또한 그 교회에서 제자들을 양육한 사람으로서 그들을 매우 사랑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교회 창립자이자 스승인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굉장히 모질게 대해했던 거예요. 바울은 깊은 배신감과 슬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 여러분, 그런 상태에서 글을 쓰다
보면 가끔 손이 막 떨릴 정도로 화가 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까지의 내용을 쓰면서 분노하면서 썼을 거예요. 한번 좀 조금만 보실까요? 고린도후서 13장 1절 2절 말씀입니다
. 나는 지금 세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 모든 소송 사건은 두세 증인의 말을 근거로 하여 결정지어야 합니다
. 내가 두 번째로 여러분을 방문하였을 때에 전에 범죄한 사람들과 또 그 밖에 모든 사람에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도 다시 말하여 둡니다
.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러한 사람들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 저 같으면요. 화가 날 때는 이런 편지를 쓰면서 여기에서 마무리할 거 같아요. 내가 다시 가면 당신들 가만히 안 둬. 이렇게 하고서 편지를 딱 마무리하는 거예요. 그러고서 보내는 거예요.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가 전달이 되겠지요. 그런데요. 바울은 저 같지 않습니다
. 바울은 이렇게 엄중한 경고의 내용을 쓰면서도 관계의 회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 그래서 13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1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이 이제이 바울이이 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화가 나는 가운데서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11절부터 이제이 화가 나서 보내는 편지를 맺는 말과 축복의 글이 시작되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 11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무난하라. 여러분, 여기에 호칭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원수들아, 대적자들아, 반란자들아, 배신자들아 이렇게 한게 아니라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 있죠. 여전히 형제예요. 바울은 자신에게 반기를든이 고린도 교회와 절교하고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하지 않습니다
. 바울이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그 망신당했었어요. 부끄러움을 당했었습니다
. 에, 저 사람 별거 아니야. 저 사람 사도 아니야. 막 이렇게 서로 막 그렇게 비난하는 그런 가운데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하지만 바울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여전히 성적인 방종 안에 있지만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인 형제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 여전히 그들을 부르는 호칭 아델포이 형제 형제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포기하지 않은 거예요. 고린도 교회가 선을 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가지 않았다
.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소망이 있다
. 비록 나에게 나를 속상하게 하고 나를 힘들게 했지만 그 교회에 반드시 소망이 있다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이 다섯 가지 명령어를 사용하면서 명령하고 있습니다
. 11절에 있는 다섯 가지 명령은 교회가 마땅히 회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 우리 아까 그 11절 말씀 한번 다시 한번 보여 주시면 첫 번째 명령어는 기뻐하라입니다
. 기뻐하라. 바울에게 나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 또한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아주 강한 경를 경고를 주었음에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결국에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 두 번째 명령은 온전하게 되라. 온전하게 되라. 지금까지 그들이 빠져 있었던 그릇된 길에서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세 번째는 위로를 받으라. 서로를 정죄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서 서로를 격려해라. 마음을 같이 하라 그랬습니다
. 마음을 같이 하라는 말은 로마서나 빌립보서 이런데도 나오는데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 이유는 왜 그래요? 지금 그들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고린도 교회에 분파들이 있었다
그랬습니다
.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고 하나되는 것이 중요하다
.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평안할지어다
그랬습니다
. 마음을 그렇게 같이 할 때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는 바로 평안입니다
. 평안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죠. 그래서 그렇게 그들이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무난하면 12절의 말씀과 같이 다른 교회 성도들도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입맞춤으로 무난할 것이다
라고 하는 바울의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과 또 목회자로서의 돌봄의 마음을 담아서이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 이제 우리가 읽은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축도로 자주 쓰이는이 말씀을 함께 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3절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아멘. 바울은요. 다른 서신들을 여러분이 살펴보시면 다른 편지를 보낼 때는 끝에 보통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이렇게만 간결하게 축복하면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 그런데 왜 유독이 상처성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언급하는 삼위일체적인 축복을 사용했을까요?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병이 그만큼 깊고 복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직 어 이때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어떤 그런 신학적인 그 어 개념이 교리가 완성되기도 전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이 고린도 교회의 이런 아픔과 문제가 사무일체 하나님 하나님과 예수님과 어 성령님이 함께 그 능력으로 치료해 주실 때에 치료가 가능한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마치 명의가 환자의 그 치명적인 증상에 맞춰서 세 가지 약을 이렇게 정교하게 조합해서 특별한 처방전을 내리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이 고질적인 병 교만한 거 그리고 분열하는 것 또 사랑이 없는 이런 병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무엘체 하나님의 총체적인 능력이 필요하다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 그래서 오늘이 세 가지를 한번 좀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바울이 내린 첫 번째 처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 고린도 교회의 가장 깊은 병은 뭐였냐면 교만이었습니다
. 고린도 교회는 영적인 지혜, 지식, 어떤 능력을 자랑하면서 서로 파벌을 나누었다고 그랬습니다
. 그들은 사도 바울의 약한 외모와 고난을 조롱하면서 그의 사도권을 의심했다고 그랬어요. 바울이 조금 몸이 아팠거든요. 그리고 말하는 것이 조금 약했습니다
. 그러니까 아 바울 저거 사도 맞냐고 이렇게 막 비난했던 것입니다
. 그들의 시선에는 강함 강한 능력이 있어야 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다
. 말도 잘해야 되고 얼굴도 잘생겨야 되고 뭔가 뭐 확실한 은사가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바울이 그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 진정한 강함은 뭐냐? 인간의 자랑이나 능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진정한 강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약함 가운데 능력에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고린도후서 13장 4절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의미,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 은혜라고 하는 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선물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 그까이 늘 쓰이는 편지 맺은 말이지만 특별히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할 때는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고린도교회 당신들 지금 서로 개파를 나누고 어 사도의 자격을 막 논할 때에 자기가 옳다
자기가 더 강하다
자기가 더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막 서로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이 적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아무 자격이 없는 그런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바랬던 것이죠.이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요. 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금 더 훌륭하지, 더 낫지. 나 조금 더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고 내가 조금 더 잘생겼고 괜찮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또 실제로 우리 눈은요. 그런 부분들을 봐요. 어떤 사람들은 더 돈 많고 어떤 사람들은 더 훌륭한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눈과 같은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 지상에서 보면 큰 집 같지만 와이 건물 진짜 높다라고 생각하지만 또 우리가 높은 산이나 비행기의 창문을 통해서 밑을 내려다
보면 여러분 아무리 큰 빌딩이나 건물일지라도 조그만 주택과 글이 차이나지 않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막 내세우고 자랑하고 이런 것은 굉장히 미숙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간구하는 순간 그 고린도 교회에 크고 높아 보이는 사람들도 또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그들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 앞에서는 모두 다 작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은혜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는요. 완벽주의, 성과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 다른 사람들의 그 소셜 네트워크, 뭐 인스타그램, 요즘에는 또 카톡이 또 왜 이렇게 바뀌어 가지고 카톡, 프로필 사진, 예쁜 사진, 멋진 곳에서 찍은 사진 왜 이렇게 많이 올라와요? 그런 것들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 그런 소셜에 올리는 것, 사진들을 보면요. 내가 이렇게 약합니다
. 내가 이렇게 멍청합니다
. 내가 이렇게 연약합니다
. 이런 것을 올리는 사람 없어요. 다 자기의 강점, 자기의 가장 좋은 시절을 올리고 있습니다
. 이제 그러다
보니까 서로서로 그렇게 어 그런 부분들을 서로 대결하다
보니까 우리가 그렇게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번나웃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시선을 잊고 땅의 시선으로 살아가면 반드시 우리는 우리는 넘어지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교만함을 다 데려놓고 온전히 예수님의 은혜만 붙들고 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두 번째 처방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 악에 측량할 수 없는 신적인 사랑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축도하실 때 뭐라 그래요? 하나님의 한량 없는 크신 사랑과 이렇게 축복 축도하시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생각하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 햇빛과 비를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내려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져 가는 인간들 모두를 버리지 않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또 도덕적인 타락의 근본 원인은 바로이 사랑 악가폐가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서로 어떤 사람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른 서신에서는 쓰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렇게 간구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그 사랑이 정말로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이 아니면 서로 나누어져 있고 싸우는이 분쟁의 교회가 다시 회복될 수가 없어요. 사람의 사랑으로론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일이 교회 고린도 교회에 필요합니다
. 아니요. 고린도 교회뿐만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모든 교회마다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하는 그런 조건적인 사랑으로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도 극심한 외로움과 관계의 공허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 교회 안에도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관계를 맺을 때 조건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 대상에서의 인간 관계라는 것이 보면 어 내가 어 돈이 많을 때 그 성공했을 때 행복해 보일 때에만 사람들이 다가오는 조건부 멤버십 클럽과 같지 않습니까? 근데 또 세상 속에서는 그렇게 잘 이렇게 돈이 많고 성공했을 땐 사람들이 막 다가오다가 내가 좀 미끄러지고 돈이 없고 실패하고 그러면 사람들이 다 어 떠나가고 그 자격 조건을 잃어버리면 이제 그 어떤 쉽게 버려지는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세상 속에서의 그 관계에서 보지 않습니까? 그 교회에서도 그러면 안 됩니다
. 돈이 많든 적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행복한 상황이든 불행한 상황이든 건강하든 또 아프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그 측량할 수 없는 큰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을 또 함께 나누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정체성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우리 안양 교회 안에 하나님의 아가패가 충만해서 모든 사람들을 차별없이 또 포용하고 감사하는 사랑많은 교회가 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마지막 처방은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 교통하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 여러분 잘 아시는 단어죠요. 이것은 허물 없는 교재 사귀을 뜻하는 말입니다
. 굉장히 친밀하고 가까운 사귀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 또한 공동의 나눔, 참여, 연합이라고 하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교회였지요. 방언의 은사가 최고다
. 아니다
.은 예언의 은사가 최고다
. 병고침의 은사가 최고지 뭐냐? 이러면서 서로 싸웠던 교회입니다
.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주셨지만 그들은 그 은사를 통해서 서로를 섬기고 세우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서 남용하고 공동체를 깨뜨린 역사가 있습니다
. 여러분,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각종인 각종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했을 거냐면 아, 우리 교회는 이렇게 수많은 다양한 은사들이 있으니까 우리는 성령 충만한 교회야.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이 스스로 성령 충만하다고 생각하는이 고린도 교회에 성령의 교통하심을 빌었습니다
. 성령님으로 충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냐? 진짜 성령님으로 충만한 교회는 싸우지 않습니다
. 갈등하고 분열하지 않습니다
.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 성령의 교통하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이끌뿐만 아니라 성도와 성도를 연결시켜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 세상 사람들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을 따라 살아가지죠.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진실한 사랑의 교재를 실천하고 또 그 안에 거하기가 어렵습니다
.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은 곧 어떤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에 의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것처럼 육신의 본능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음행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분쟁과시기 같은 것들을 따라가 따라 살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교재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도의 교재는 나눌 수가 없습니다
. 성도의 교재는 오직 성령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죠.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살 때에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를 맺게 되고이를 통해서 성령님 안에서 교재를 나누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지금 누군가와는 친한데 누군가와는 도저히 친할 수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또는 교회 안에서 여러분 따로 떨어져 있고 외로운 느낌을 받고 그렇게 고독감을 느끼시는 분들 그런 분들에게 또 다가가기가 어려운 분들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성령의 교통하심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고린도 교회가 참으로 바울을 힘들게 했지만 바울은 끝까지 고린도 교회를 버리지 않고 그들이 바른 믿음으로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 그리고 어쩌면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말씀은 그런 깊은 아픔과 상처 가운데서도 고린도 교회를 내어주는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내어주는 바울의 가장 핵심적인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 너무나도 사랑하는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축복하는 마음이 담긴 기도인 것이죠. 그리고이 말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계속해서 축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축도를 통해서 다시 우리 귀에 들릴 때마다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회복되도록 마음에 결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여러분 이제 축도를 여러분이들을 때마다 여러분 우리는이 세 가지를 마음속에 다시 한번 새겨야 합니다
. 첫 번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주님 저의 교만을 내려놓겠습니다
. 나의 약함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신뢰하겠습니다
. 이렇게 여러분 마음속에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라고 하는 말을들을 때에 세상이 주는 어떤 불안과 비교 의식에서 벗어나서 우리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그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누리겠습니다
.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나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 성령님의 교통하심 안에서 나와 다른 지체들과 서로 연합하겠습니다
. 진정한 교회 안에서의 성도로서의 소속감과 기쁨을 찾아 누리겠습니다
. 이렇게 여러분이 결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억하십시오. 축도는 우리가 받은이 3위일체 하나님의 복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사명을 다하며 살도록 우리를 파송하는 시간입니다
. 그러니까 축도는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예배의 끝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축도는 여러분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시작이 되는 시간입니다
. 이제 예배를 마치고 각자 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이 은혜와 사랑과 또 교재의 복을 누리는 것을 넘어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그 깨어진 세상 속으로 그 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이 시간 우리 함께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제목 먼저 나누면 오늘 우리가 함께들은이 말씀 기억하면서 예배가 끝난 후에 삶의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교만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세상에 헛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갈등을 넘어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함께 그렇게 기도하며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아버지 사랑합니다
. 아버지 사랑합니다
. 아버지 사랑합니다
. 아버지 경배합니다
. 아버지 채워 주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예수님 사랑합니다
. 예수님 사랑합니다
. 예수님 경배합니다
. 예수님 세워 주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성령님 사랑합니다
. 성령님 사랑합니다
. 성령님 평합니다
. 성령님 세워 주소서. 주님의 오늘 말씀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할 때 주여 믿습니다
. 외치고 기도합니다
. 주여 믿습니다
. 하나님 오늘 우리가 오늘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주는 축복의 마음 또 축복하는 마음을 함께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 우리는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또 서로의 사랑을 내려놓고 우리 주님만 자랑하며 십자가만 자랑하며 우리 주님의 강하신 능력만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겸손하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 우리는 세상 가운데 세상 사람들이 살아하는 것처럼 조건적으로 사랑했지만 사랑의 조건을 붙였지만 하나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사랑을 우리가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무조건적인 사랑 차별하지 않는 그 사랑을 우리가 성도들과 함께 나눈 우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 구하길 원합니다
. 하나님 개인적이고 하나님 개인주의적이고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또는 파버를 나누고 분당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안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들 되게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직세들과 성령 안에서 깊이 연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하나님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랑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강하게 하는 것이며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 우리가 그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 되게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우리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렇게 또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축복하는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상처받고 갈라졌던 교회를 치유했던 이일체 하나님의 복주심이 바로 저희의 삶에도 꼭 필요한 복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교만을 내려놓을 용기를 주시옵소서. 저희의 부족함 속에서도 일하시는 주님의 그 풍성한 은혜만을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조건 없이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교회 안에 다툼이나 외로움 없이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으로 우리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의 교통하심으로 저희가 서로 친밀하게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 안에서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으며 참된 공동체의 행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아가 삶의 예배를 드릴 때에 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복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아멘. M.